[트랜서핑 용어] 프레일링
당신의 외부 의도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그의 내부 의도를 사용한다는 것이 이 원칙의 원리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내부 의도가 쓰는 기존의 방법으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그 사람한테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원칙을 따르면 당신은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사업관계에서 놀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외부 의도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그의 내부 의도를 사용한다는 것이 이 원칙의 원리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내부 의도가 쓰는 기존의 방법으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그 사람한테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원칙을 따르면 당신은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사업관계에서 놀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교회 목사들의 얘기는 귀담아 듣지 않는데 이 분의 성공 비지니스 스토리텔링은 예외다. 직접 만난 적이 있는데 비지니스 감각도 뛰어나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가진 분인 것 같다. 살림살이를 빼 놓은 신앙은 영지주의에 빠진다며 경계를 한다.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만…이건 나중에 좀 더 생각해 볼 문제)
요즘 비지니스계에서 자주 언급하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경영’, 신앙도 수행도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살림살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김종춘 목사가 보내는 뉴스레터에서는 성경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성공을 위한 태도,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비법들을 다 만들어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 ^^
믿는 자에 복이 있나니…
대흠.
안 된다고 믿든지, 된다고 믿든지 둘 다 맞다. 믿는 그대로 된다. 교통사고가 날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면 어느 날 교통사고가 난다. 예감이 적중한 게 아니다. 그런 느낌의 반복이 그런 길을 만들어 안내했을 뿐이다. 흉한 생각, 느낌, 말이 계속 반복되면 큰 일이다. 그런 길이 만들어지고 거기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생각, 느낌, 말은 길을 만들고 길잡이가 된다. 그렇기에 말을 할라치면 더 좋은 쪽으로 말해야 한다.
“우울한, 울적한, 고독한, 낙심되는, 절망스러운, 침체된, 피곤한, 불안한, 두려운, 겁나는, 걱정되는, 짜증나는, 화나는, 실망스러운, 불쾌한, 창피한, 고통스러운…” 이런 말이 이런 감정, 행동, 현실을 초래한다. “눈부신, 황홀한, 환상적인, 매혹적인, 끝내주는, 죽여주는, 굉장한, 대단한, 특출한, 짜릿한, 고결한, 훌륭한…” 앤서니 라빈스에 따르면 말을 바꾸면 감정도, 행동도, 현실도 바뀐다.
“인생은 막 쪄낸 빵이 가득한 바구니이다. 아니다. 인생은 깊은 수렁이다.” “인생은 놀이이고 춤이다. 아니다. 인생은 노동이고 전쟁이다.” “깃털처럼 가볍고 종달새처럼 즐겁다. 아니다. 세상의 짐을 다 멘 것 같고 암담하기 그지없다.” “지금의 고난이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아니다. 단지 지금이 겨울일 뿐이다. 머잖아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어떤가.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감정도 바뀌고 현실도 바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고무줄을 아무리 세게 당겨 늘어뜨려도 그 고무줄의 탄력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현재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아예 고무줄을 끊어 그 고무줄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현재의 상태를 타파해야 하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 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IT업계가 요즘 더욱 흔들린다는 것은 새로운 기회, 큰 기회가 다시 오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회가 매년 20만 명씩 감소한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모델이 등장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8월 28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서, 광적인 집단최면 현상을 하나님의 능력체험 또는 천국체험이라고 속이며 악용하고 착취하는 사례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부 목회자들에게서 자행돼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섬뜩하게 들었다.
사이비 신앙이나 이단 신앙은 최면과 종속과 착취를 초래하게 되고 건전한 신앙은 자율과 성장과 성숙으로 이끈다. 정신이 빛나지 않는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목회자나 성도가 어느 정도 정신분석학 또는 심층심리학을 알고 있지 않으면 저질의 집단최면 현상을 신령한 능력체험으로 오해하거나 곡해하게 된다.
정치인의 수준이 높아지려면 필연적으로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 저질의 정치인이 걸러져야 하듯이 목회자의 수준이 높아지려면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만 한다.
내가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강렬한 반복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목표의 설정, 효과적인 전략의 채택, 그리고 더 나은 반복의 지속이 성취를 낳는다. 강렬한 실행의 반복 외에는 왕도가 없다. 실행하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하고 실행하면 성취한다. 강렬하게 실행하면 크게 성취하고 강렬하게 반복해서 실행하면 위대하게 성취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베낀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일까.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베낌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조부모와 부모의 베낌이다. 베낌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자기다움을 추구할 때, 남다른 창조가 일어난다. [베끼고 훔치고 창조하라](매일경제신문사) http://bit.ly/hTh1I4
트랜서핑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원칙과 방법을 제시한다.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지를 걱정하지 않고 마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처럼 그저 선택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목표가 주문자의 직접적인 행동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실현되는 것이다. 당신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꿈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선택은 불변의 법칙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선택의 본질을 한두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트랜서핑은 선택이란 무엇인지, 그러한 선택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출처: 트랜서핑의 비밀
펜듈럼은 사람의 에너지를 빨아먹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감정에 걸려들게 한다. – 분노, 불만, 증오심, 격분, 불안, 근심,위축감, 혼란, 절망, 공포, 동정심, 애착, 황홀, 이상화, 숭배, 감탄, 실망, 오만, 자긍심, 자만, 멸시, 혐오감, 모욕, 의무감, 죄책감 등등.
파괴적인 펜듈럼의 가장 주된 위험성은 그것이 자신의 영향 아래 희생자가 된 사람을 행복을 누리는 인생트랙으로 부터 벗어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은 강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멀어지는데, 그러한 강요된 목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펜듈럼은 그 본질상 ‘에그레고르 egregor’ (심리학이나 은비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염체(念體) 혹은 집단적인 상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개념이 펜듈럼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에그레고르’라는 개념은 사람과 에너지 기반의 정보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전반적인 뉘앙스를 반영해주지 못한다.
상덕은 덕이 아니다.
그래서 덕이 있다.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어진다.
상덕은 의도가 없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 없지만
하덕은 의도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있다.
<원문>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
而無以爲
下德爲之
而有以爲.
<독음>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상덕무위
이무이위
하덕위지
이유이위.
(노자 38장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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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녀에게 덕을 베풀고자 하고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덕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지요.
노자를 만나니 이렇게 말해 줍니다.
“덕을 베풀려고 의도하지 않는 것이 상덕이다.
그 때 비로소 덕이 있게 되리라.”
의도하면 의도와 멀어지는 이유,
그것은 우리가 자연(自然)이기 때문이지요.
이 편지는 2500년 전 무위하며 자연으로 살았던 노자(老子)가
오늘 “잘 하려고 하는” 일마다 힘들어지는 우리에게 전하는 편지입니다.
받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받을 수 있고
주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철학박사 손기원 (지혜경영연구소 www.onwisd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