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이루려 하지 마라

너무 빨리 이루려 하지 마라

2013-06-26_104012

예수님 등 성인들의 말씀이나 각 종교의 경전에는 성공적인 삶을 위한 경구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공자님도 예외는 아니군요.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에 걸림이 있으면 의식의 성장/진화에도 장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서두르면 중요성이 높아지며 자연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깨진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자연의 균형력이 일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두른 사람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요.

너무 빨리 이루려 하지 마라.

너무 빨리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조그만 이익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무리하게 빨리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조그만 이익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無慾速 欲速則不達 見小利 則 大事不成)
-공자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마음이 급하게 되면 무리한 목표 수립,
원칙과 기본 무시가 뒤따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목표 달성이 된다 하더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해 곧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빨리하고자 하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욕속부달(欲速不達)의 지혜를 새겨봅니다.

출처: 행복한 경영이야기

[트랜서핑 용어] 잉여 포텐셜


잉여 포텐셜은 균일한 에너지장 속에서 일어나는 긴장, 국소적인 교란이다. 이런 불균형은 어떤 대상에다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할 때 사념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망은 원하는 대상을 그것이 없는 곳으로 끌어당겨 오려고 애쓰는 것이기 때문에 잉여 포텐셜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는 힘겨운 욕망이 에너지적인 ‘기압차’를 형성해서 균형력의 바람을 일으킨다. 잉여 포텐셜의 다른 예는 분노, 열광, 이상화, 숭배, 과대평가, 경멸, 허영심, 우월감, 죄책감, 열등감 등이다.

[트랜서핑 용어] 균형력

잉여 포텐셜이 있는 곳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균형력이 발생한다. 어떤 대상에 지나친 중요성이 부여될 때 사람의 사념 에너지에 의해 잉여 포텐셜이 생성되는 것이다. 예컨대,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해보자. 한 상황에서는, 당신은 자기 방의 바닥에 서 있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어느 절벽 끝에 서 있다. 첫째 경우는 아무런 걱정이 없지만, 둘째의 경우에는 실제 상황이 당신에게 매우 중요해진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니까. 에너지 차원에서는, 단순히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은 첫째와 둘째의 경우 양쪽에서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절벽 끝에 서 있으면 두려움이 일어나 당신의 내부에 긴장이 일어난다. 그래서 당신은 에너지장에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그런 불균형을 제거하기 위해 균형력이 생기는 것이다. 당신은 그 힘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즉, 한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당신을 절벽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다른 힘이 당신을 절벽 끝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의한 잉여 포텐셜을 제거하기 위해, 균형력은 당신을 절벽 끝에서 멀어지도록 잡아당기거나, 혹은 당신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그 상황을 종료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절벽 끝에 서 있는 동안 느끼는 것은 이 균형력의 작용인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잉여 포텐셜을 제거하기 위한 균형력의 작용이다. 사람들은 종종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를 얻는데, 그만큼 이 힘은 교활한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다. 바로 여기서 ‘머피의 법칙’과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악의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트랜서핑의 비밀

생명력

생명력

지난 몇주 간에 걸쳐 펜듈럼에 시달렸는데 이제 좀 조용해졌다. 펜듈럼이 조용해진건지 내 마음이 조용해져 펜듈럼이 시비를 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건지… 일상을 살아가면서 좌절과 회생이 끝없이 반복이 된다. 펜듈럼으로 부터 자유로우며 에너지 불균형을 일으키지 않고 생명력을 키우게 되면 트랜서핑 원리 내에서는 비교적 적극적인 행동, 의도가 살아날 것이다. 

생명력을 높이기 위해 길을 걸을 때마다 위,아래로 관통하는 자유 에너지를 상상하는데 그동안 별 진전을 못보다가 며칠새 미세하게나마 느낌이 강해진 것 같다. 

대흠.

 

생명력

 

쿤달리니

쿤달리니

트랜서핑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과 충분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잉여 포텐셜의 짐을 벗어던지고 펜듈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당신은 이전에 쓸모없이 낭비했던 에너지를 상당히 회수했다. 하지만 에너지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인체 내의 에너지는 두 가지 형태로 구별할 수 있다. – 생리적 에너지와 자유 에너지(Free energy)가 그것이다. 생리적 에너지는 음식물을 소화시켜서 얻는다. 자유 에너지는 인체를 통해 흐르는 우주의 에너지(Space energy)다. 이 두 가지 에너지가 우리를 감싸는 에너지 보호막을 형성한다. 인간의 에너지는 육체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또한 주변 공간으로도 방사되고 있다.

우주의 에너지는 공간 속에 무한히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에너지의 아주 작은 일부 밖에 받아 들이지 못한다. 우주의 에너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인체를 통해 흐른다. 첫째 흐름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남성은 척추 앞 1인치, 여성은 척추 앞 2인치 지점을 흐른다. 둘째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거의 척추를 따라 흐른다. 사람이 지닌 자유 에너지의 양은 이 중앙 에너지 통로의 폭에 비례한다. 통로가 넓을수록 에너지가 많이 흐른다…

인간의 생명력은 신체 근육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긴장된 근육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흐름의 정상적인 움직임을 어렵게 만들고. 인체 에너지 장의 발산을 방해한다. 긴장은 전체 에너지 장에 불균형을 일으킴으로써 균형력(균형을 잡는 힘)을 발생시킨다. 에너지를 평균 수준에 이를 때까지 감소시키는 방법이나, 발생된 포텐셜을 반대 극성의 에너지로 상쇄시키는 방법을 통해 균형을 복구시킬 수 있다. 예컨데 위의 경우, 친구들이 지나치게 경직된 그를 농담으로 놀려 주는 등으로 말이다.

사람의 실질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자유 에너지이다. 당신이 만일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 에너지가 부족함을 뜻한다. 에너지가 부족할 때는 습관적인 일은 억지로라도 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떠맡는 것은 어렵다. 적극적으로 즐기면서 하는 일의 배후에는 의도가 있다. 자유 에너지가 없으면 의도도 있을 수 없다. 생리적 에너지는 엄밀히 말해서 행위를 하는데 쓰인다. 우리가 주로 관심을 기울일 것은 의도의 형성에 쓰이는 에너지로서, 의도 에너지다. 바로 이 의도 에너지 덕분에 우리는 가지기로, 그리고 행동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리얼리티 트랜서핑 3권 1장 에너지

 

잉여 포텐셜과 균형력 – 죄책감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죄책감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잉여 포텐셜이다. 자연에는 선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균형력에게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지면 모든 경우에 균형은 복구된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당신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짓인지를 알므로 죄책감을 느낀다. (“난 벌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진다. 좋은 일을 하면 그 행의의 의미를 알므로 자부심을 느낀다. (“난 상을 받아야 해”)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진다. 균형력에게는 누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 등의 개념이 없다. 균형력은 단지 에너지장에 일어난 부조화만을 제거한다.


佛家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善業(선업)이라 하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은 惡業(악업)이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이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보답을 받는다고 하지만 업을 짓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등한 행위로 본다.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바딤
젤란드는 선업과 악업의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적 관점에서 그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본다.
우리는 막연히 보상 등의 물질적 개념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에 대해 차별을 두는 성향이 의식 깊숙히 뿌리 박혀 있는 것 같다.

대흠.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뻔뻔스러움은 둘째가는 행복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균형력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무뢰한들을 벌해주시기를 바란다.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슬프게도, 자연은 정의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끝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것은 죄책감을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후안무치한 냉혈인간들은 벌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종종 ‘노력’의 대가로
성공을 누린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늘이시여 왜 이리도 불공평하신가요? “하는 원망의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그런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러한 냉정함과 무심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마음-영혼-환생-우주에 걸치는 인과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눈으로 볼 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너지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인의 성공에 촛점을 맞춰 본다면 위와 같은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