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 포텐셜과 균형력 – 죄책감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죄책감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잉여 포텐셜이다. 자연에는 선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균형력에게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지면 모든 경우에 균형은 복구된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당신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짓인지를 알므로 죄책감을 느낀다. (“난 벌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진다. 좋은 일을 하면 그 행의의 의미를 알므로 자부심을 느낀다. (“난 상을 받아야 해”)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진다. 균형력에게는 누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 등의 개념이 없다. 균형력은 단지 에너지장에 일어난 부조화만을 제거한다.


佛家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善業(선업)이라 하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은 惡業(악업)이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이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보답을 받는다고 하지만 업을 짓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등한 행위로 본다.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바딤
젤란드는 선업과 악업의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적 관점에서 그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본다.
우리는 막연히 보상 등의 물질적 개념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에 대해 차별을 두는 성향이 의식 깊숙히 뿌리 박혀 있는 것 같다.

대흠.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뻔뻔스러움은 둘째가는 행복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균형력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무뢰한들을 벌해주시기를 바란다.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슬프게도, 자연은 정의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끝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것은 죄책감을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후안무치한 냉혈인간들은 벌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종종 ‘노력’의 대가로
성공을 누린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늘이시여 왜 이리도 불공평하신가요? “하는 원망의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그런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러한 냉정함과 무심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마음-영혼-환생-우주에 걸치는 인과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눈으로 볼 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너지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인의 성공에 촛점을 맞춰 본다면 위와 같은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