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의해서 대흠 | 1월 26, 2010 | 리얼리티 트랜서핑
리얼리티 트랜서핑 번역자 박인수님이 다음과 같이 일곱번째 워크샵을 하네요.
저도 한번 참석해 보고 싶네요. 박인수님도 한번 뵙고요. ^^
7차 트랜서핑 체험 기초과정 워크샵

워크숍에서 체험할 내용
1. 트랜서핑(Transurfing)의 원리 이해하기
2. 가능태 공간 느끼기
3. 파괴적인 펜듈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4. 실패에서 성공의 물결로 바꿔 타기
5. 파괴적 욕망을 내려놓고 삶의 흐름을 타기
6. 잠에서 깨어있기와 삶에서 깨어있기
7. 즉석에서 마법의 힘을 체험하기
8. 과거를 바로잡기 – 과거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여행
대흠.
에 의해서 대흠 | 1월 17, 2010 | 리얼리티 트랜서핑
앞으로 펜듈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내 자신이 펜듈럼에 대한 감각이 흐려져 간다.
자연과 동물을 보호하는 단체나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도 펜듈럼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다.

그런 단체들이 무엇이 그렇게 파괴적이란 말인가? 그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먹고 살면서 당신의 행복이나 복지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당신을 위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파괴적인 점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하면서도, 정작 당신의 행복에는 무관심하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당신은 거기서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당신의 소명으로 여겨질 것이고 당신은 자신의 펜듈럼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 자신이 단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진실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와 돈을 주는가, 아니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선적인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트랜서핑으로써 종교집단이나 사회운동 단체 또는 학파를 만든다면, 트랜서핑도 하나의 펜듈럼이 될 수 있다. 물론 펜듈럼도 파괴적인 정도는 저마다 다르다. 트랜서핑은 최악의 경우에도 훨씬 덜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1권-
자선, 종교, 정치를 포함하는 모든 단체나 조직은 펜듈럼이다. (이건 결코 펜듈럼이라고 비난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때로는 펜듈럼일 수 있다.)
2000년 전후로 모 단체에서 기수련 했는데 이 단체의 비전은 ‘인류의 구원’이었다. 그런 거창하고도 공익적인 비전을 실천하는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나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묻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이 많다. 이 단체는 개인적인 행동방식이나 취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내가 그 단체를 떠난 이유 중 한가지다. 좋은 뜻을 갖고 있지만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어떤 명분에 의해 목표에 변화가 생기면 그럴듯한 대의명분 하에 파괴적인 모습으로 변질이 될 수 있다. 전체주의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이다.
대흠.
에 의해서 대흠 | 1월 16, 2010 | 리얼리티 트랜서핑
깨어있지 않은 채로 살다 보면 펜듈럼에 휘말려 에너지를 빼앗기고 만다. 어젯밤 그 싸움을 말리지 말아야 했었다. 최소한 마음 속으로 상황을 무시하고 단지 관찰자로 남아 있어야 했었다. 결국엔 고성에 욕설에 술자릴 어지럽히고 싸움까지 벌인 그 펜듈럼에게 에너지를 제공했다. 물론 펜듈럼이었던 그 친구도 또 다른 펜듈럼에 휘말려 있었을 것이다.

펜듈럼은 그 본질상 하나의 에그레고르(egregor) – 심리학이나
은비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염체(念體) 혹은 집단적인 상념을 의미한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펜듈럼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에그레고르’라는 개념은 사람과 에너지 기반의 정보체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모두 반영해 주지 못한다. 펜듈럼은 사람들의 삶에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1권-
에너지 펜듈럼을 관념적으로 인식하기 보다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펜듈럼이 접근해 올 때 꺠어있을 수 있을 것이다. 펜둘럼의 속성을 살펴 봄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펜듈럼에 대해 인식해 보기로 하자. 아울러 펜듈럼에 대한 명상도 필요할 것 같다.
펜듈럼의 속성
- 펜듈럼은 그 지지자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 그로써 펜둘럼은 진폭이 점점 더 커진다.
- 펜듈럼은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지지자를 가능한한 많이 끌어들이려 한다.
- 펜듈럼은 지지자 그룹을 다른 모든 그룹과 비교하고 대항하게 한다. (우리를 좀 봐! 우리가 그들보다 낫지.)
- 펜듈럼은 지지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모든 이를 공격적으로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을 복속시키거나 중화시키지 못하면 모조리 제거하려 애쓴다.
- 펜듈럼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가능한 한 많은 지지자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멋지고 매력적인 가면을 쓰고 고상한 목표로 위장하며, 사람들의 감정을 조종한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1권-
대흠.
에 의해서 대흠 | 1월 12, 2010 | 리얼리티 트랜서핑
벅샷님의 블로그 포스팅 ‘결심, 알고리즘‘ 을 읽고 댓글을 달다가 욕심이 생겨 내 블로그에 올리고 트랙백을 달기로 마음을 바꿨다.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신 벅샷님과 아거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거대 기업에서도 ‘실행’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훌륭한 기업 조차도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하물며 개인은 오죽하겠습니까.

조금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의 관점에서 보면 의식이 지어낸 생각이나 계획이 잠재의식에 프로그램되지 않으면 작심삼일이 될 가능성이 높죠.
나름 논리적이긴 하나 매우 비과학적이라(우리 큰딸래미 왈^^) 할 수 있는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 말하는 내부, 외부의도가 생각나네요. 전자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이고 후자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미지의 힘. 이 외부의도가 내부의도의 소산인 생각(욕망)을 가능태 공간(우주의 에너지 정보장)의 현실화된 섹터로 인도를 함에 따라 실현이 된다고 합니다. 외부의도를 조종하려면 하지않으면서 해야 하는(無爲의道)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걸 가능케 하는 마음상태를 겸허함(혹은 깨어있음)이라 풀어볼 수도 있겠네요.
“새해 결심은 겸허하고 유연하고 다중적이어야 한다.“는 벅샷님 말과 매칭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와이즈맨 박사는 새해 결심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심을 딱 하나만 세우고, 그 세운 결심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라는
조언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새해의 결심을 하나만 세워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있단 말인가?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부담 혹은
인지 부하(cognitive load)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지 부하라는 것은 어떤 일(과제)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정신적
노력의 양을 말한다.
원문 출처 : 새해 결심과 인지적 부하
또한 마음과 영혼이 의기투합(?) 하면 인지부하가 ‘Zero’에 가까워 질것으로 봅니다. 인지 부하가 작을수록 그 만큼 적은 에너지로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겠지요.
외부의도를 움직여 성공의 물결을 타려면 마음(의식)과 영혼(잠재의식)이 서로 합의(일치)를 이루어야 하는데 의식이 영혼에게 “선언적이고 강압적이고 단선적“으로 지시할 때는 합의가 아닌 명령이 되어 일이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게 되지요.^^
좀 더 다듬고 보완을 하면 현대 경영학(Tangible)과 에너지장을 다루는 기술인 고대 신비지식(Intangible)을 접목할 수 있는 포인트가 하나 생길 것 같기도 합니다.
대흠.
에 의해서 대흠 | 12월 30, 2009 | 리얼리티 트랜서핑
순서가 좀 바뀌었다. 늦었지만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저자를 소개한다. 별로 말할 것도 없지만… ^^

젤란드 웹사이트
舊 소련의 양자물리학자였고, 이후에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다중우주 이론을 기반으로 현실변환 기법을 설명한
[리얼리티 트랜서핑]시리즈로 단숨에 러시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본 시리즈의 번역 출간이 진행되고
있으나, 유명세를 원하지 않는 탓에 저자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책에 소개된 개념들이 신비주의
교의들과도 통하는 바가 있어 ‘현대의 신비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출처 : 인터파크
에 의해서 대흠 | 12월 23, 2009 | 리얼리티 트랜서핑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죄책감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잉여 포텐셜이다. 자연에는 선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균형력에게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지면 모든 경우에 균형은 복구된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당신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짓인지를 알므로 죄책감을 느낀다. (“난 벌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 진다. 좋은 일을 하면 그 행의의 의미를 알므로 자부심을 느낀다. (“난 상을 받아야 해”) 그래서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진다. 균형력에게는 누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 등의 개념이 없다. 균형력은 단지 에너지장에 일어난 부조화만을 제거한다.

佛家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善業(선업)이라 하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은 惡業(악업)이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이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보답을 받는다고 하지만 업을 짓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등한 행위로 본다.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바딤
젤란드는 선업과 악업의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적 관점에서 그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본다.
우리는 막연히 보상 등의 물질적 개념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에 대해 차별을 두는 성향이 의식 깊숙히 뿌리 박혀 있는 것 같다.
대흠.
‘책 1권 러시아 물리학자 시크릿 노트’에서 발췌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뻔뻔스러움은 둘째가는 행복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균형력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무뢰한들을 벌해주시기를 바란다.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슬프게도, 자연은 정의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끝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것은 죄책감을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후안무치한 냉혈인간들은 벌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종종 ‘노력’의 대가로
성공을 누린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늘이시여 왜 이리도 불공평하신가요? “하는 원망의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그런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러한 냉정함과 무심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마음-영혼-환생-우주에 걸치는 인과관계 전체를 아우르는 눈으로 볼 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너지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인의 성공에 촛점을 맞춰 본다면 위와 같은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