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도올기자가 만난 사람>한국에 모던 포크,록시대 연 한대수

김용옥 기자/doholk@munhwa.co.kr

정초에 어느 여인이 정성스럽게 쓴 편지와 함께 음반 하나를 보내왔다. 씨디 자켓에는 갈치 목을 졸라 들고 서있는 사람 얼굴이 크게 실려있었다. 또 체하는 놈이 한 놈 있었구만.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를 얘기하기엔 너무 늙었군. 난 생명체의 목을 졸라 예술의 냄새를 피우는게 싫어. 갈치는 푸른 바다에 있어야지. 시답지 않게 생각했지만, 문득 눈에 띈 ‘호치민’이라는 노래 제목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씨디플레이어의 보탄을 눌렀다. 순간 나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것은 그냥 호치민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48701;이었다. 그런데 일정한 리듬에 맞춘 &#48701;이 아니라 그냥 내가 강의하듯이 말하는 내래이션 &#48701;이었다. 그 자체로 이미 충격.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내래이션 &#48701;의 배경으로 힙합 비트를 쓴 것이 아니라 헤비메탈의 정통 록리듬을 썼다는 것이다.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고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창조적 발상이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음악양식의 완벽한 파괴였다. 제기랄 이럴 수도 있는 것이라면, 나도 강의를 이렇게 해봤을 걸. 창조성을 선취당한 허탈감에 휩싸일 즈음, 걸쭉한 그의 목소리는 잠자는 나의 양심 같은 것을 일깨우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노스탈자를 자극하는 목소리였다.

그냥 생각없이 내지르는 소리 같았지만 인간의 보편적 내면에 호소하는 영혼의 맑음, 그런 청아함이 느껴졌다. ‘애스 포레버!’(as forever!)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사랑도, 인생도, 제국의 권력도, 친구도, 적도 영원하지 않아. 로마제국도 멸망했어. 아메리카제국에도 석양이 찾아오고 있잖아. 내 사랑도 런던의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어. 모든 영원성을 거부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씨디플레이어로부터 흘러나왔다. 굿바이, 굿바이! 이렇게 이렇게 난 한 인간의 예술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곧 그를 수배했다. 한대수(韓大洙)! 난 그 이름을 나의 생애에서 계미년 벽두에야 처음 접했다. 이것은 우리역사의 암울했던 70년대가 나의 외유 때문에 내 의식 속에선 완벽한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한편 내가 살아온 지식의 세계가 얼마나 우리나라의 대중문화와 유리되어 있었나를 입증하는 증표이기도 할 것이다.

다듬지 않은 얼굴, 흐드러진 머리카락, 거대한 체구, 이태리 가죽장화를 쭉 째고 성큼 현관을 들어선 그는 내 손을 잡았다. 토속적 정감이 어린 매우 따사로운 손길이었다. 우린 곧 친구가 되었다. 벽난로엔 불길이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고, 테이블 위엔 몇 년을 내가 귀하게 간직해오던 양주(良酒)가 놓여졌다.

“예술은 방귀야.(Art is fart.)”

―아트(art), 파트(fart), 운(rhyme)이 잘 맞는군. 그런데 방귀란 뭔 뜻이지?

“예술가들은 이름이 나거나 성공하면, 너무 자신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병이 있어. 어제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휴지쪽이 하루아침에 5만 불·10만 불에 팔리면 아∼ 내가 정말 위대하구나! 그런 착각에 빠지거든. 죤 레논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유명하다구 얘기했다가 된서리 맞은 적이 있지. 마이클 잭슨도 너무 유명해지다 보니깐 자기 삶의 리알리티로부터 멀어져갔어. 그래서 예술로부터 추방당했어. 그런데 예술이란 우리 몸에서 가끔 피식 새어나오는 방귀에 불과한 것이라구.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위험해. 난 내 예술을 가끔 참지 못해 터져나오는 방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래! 그래! 참 좋은 말이다.

이러한 표현들 때문에 우리는 그를 ‘히피’라 불러야 할까? 천만에! 그는 너무도 겸손했고, 너무도 상식적이었다. 그에게는 배토라진 한국인의 심성이 눈꼽만큼도 없었고, 꾀죄죄한 찌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을 뿐이다. 그는 순결하기 그지없는 음유시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한 몸 속에 토속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한국인과,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전위를 달리는 뉴요커 미국인, 완벽한 두 개의 개체가 타협없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몸은 김치와 된장입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고도의 어휘를 구사하게 되면 그에게 편한 말은 영어였다. 우리는 취기가 더해가면서 영어로 씨부렁거렸다.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은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우리나라의 거상이었다. 이승만에게 달라 돈줄을 대는 모종의 임무를 띠고 홍콩으로 가는 아버지의 통역원으로 백남준이 대한민국여권 제7번을 얻은 것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었다. 따라서 백남준의 삶에는 조선근대사의 회한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백남준의 가계가 상(商)이었다면, 한대수의 가계는 개화기를 통해 우리가 가장 부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명문 사(士)족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한영교(韓永敎)는 언더우드 박사가 백낙준과 함께 총애하던 인물이었다. 프린스턴 세미나리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취득 후 그는 연희전문의 초대학장·초대대학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음악이었다. 점심시간에도 동료들과 식사를 즐기기보단 사택에 부지런히 돌아와 매그노복스 엘피전축을 크게 틀고 바그너, 베토벤, 바하, 라벨을 듣고야 다시 강단으로 나가곤 했다.

“나의 음악정서는 모두 할아버지 영향입니다.”

한영교는 대일본제국주의가 원자폭탄으로 패망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들 한창석을 핵물리학자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한창석은 조부의 중매로 다니던 교회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부산베이스의 대부호의 딸 박정자와 결혼한다. 한창석은 서울공대를 다니다가 1948년 아직 백일도 되지 않은 한대수와 사랑하는 부인을 남겨둔 채 선편으로 코넬대학유학의 장정에 오른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일 줄이야! 한창석은 코넬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몇 년 후 신비롭게도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의문의 실종은 아직까지도 모든 사람의 물음표로 남아있다. 이휘소 박사를 둘러싼 음모 비슷한 것일까? 당신 아버지 얘기는 ‘무궁화꽃이 지었습니다’ 하면 되겠구만. 그러나 문제는 영원한 침묵 속에 그 진상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 침묵 속에서 한대수의 비극적 삶이 그려졌고 그의 음악이 태어났다.

“예술은 고통과 고독 속에만 태어납니다. 기뻐 죽겠다고 날뛰는 놈한테서 뭔 예술이 나오겠어요? 그렇지만 그 고통이 꼭 슬프게만 표현되는 것은 아녜요. 반 고호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세요, 그렇게 밝고 명랑할 수가 없어요. 고호 자신의 삶은 귀를 삭뚝 짤라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쥐약 먹고 자살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폴 고갱의 그림을 보세요. 황토색과 보라빛의 타히티여인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밝은 힘을 표출하고 있잖아요?”

국민학교 5학년생인 대수를 데리고 조부 한영교는 뉴욕으로 건너간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에반젤리즘의 성공사례인 한국기독교사의 고난과 환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설교는 시들어만 가는 미국기독교인들의 심령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영교는 미국으로 역수입된 한국인 첫 선교사였다.

“우리가 산 맨해튼 엎타운 리버사이드 클레어몬트 애배뉴 아파트 응접실에서 내려다보면 버나드 칼리지의 테니스코트가 보였어요. 전후의 참상 속에서 자란 내가 받은 컬쳐쇼크는 쉽게 짐작하시겠죠? 우리집엔 안익태 선생이 예쁜 스페인 부인과 잘 들낙거렸어요.”

다행스럽게도 대수는 중1 때 귀국한다. 그리고 경남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와 기타를 배운다. 그러다가 고2 때 어느 날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할머니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FBI가 너의 아버지를 찾았대. 우리는 이제 미국으로 이민간다.”

한창석은 핵물리학자에서 맨해튼의 거물급 인쇄업자로 변모되어 있었다. 이미 재혼해 떠나가 버린 엄마, 전혀 다른 제2의 이고(Ego)로 변신한 아버지, 17년 동안 실종된 한대수의 응어리진 실존, 부모에 대한 추억과 기대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초원 속에서 좌절로 증폭될 뿐이었다. 아버지는 철저히 과거를 망각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미국 의붓엄마의 냉대 속에 그가 만난 아버지는 냉혹한 미국인 사업가였다. 산보 한번 같이 해주는 자상함이 없는 부정(父情)이었다. 흰둥이들의 호기심과 멸시 속의 고도에서 그는 부산에서 들고 온 기타를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엘비스에 미칠 때까지만 해도 작곡이란 전문적 영역이래서 넘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비틀즈가 나오면서 작곡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예술이란 삶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면 되는 것이라는 발상이 나에게 스며들기 시작했어. 그래서 아무렇게나 콩나물대가리를 그려보기 시작했지. 한 스무 곡 써보니까 뭔가 내 것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중에 김민기가 히트 친 ‘바람과 나,’ 양희은을 통해 국민의 사랑을 받은 ‘행복의 나라로’가 모두 18살 때 롱아일랜드의 골방에서 쓴 거야.”

우유만이 한국인의 영양을 개선할 길이라고 권유하는 조부의 역사의식 덕분에 뉴햄프셔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다가 때려치우고, 뉴욕 인스티튜트 어브 포토그라피에서 사진을 전공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격렬한 히피의 삶을 체험한다. 이스트빌리지에서 마리화나 연기에 몸이 쩔어갈 즈음, 참상을 목격한 외삼촌에게 코가 꿰여 또 다시 조국의 땅을 밟는다. 그는 이미 비틀즈를 동경하는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는 또 하나의 비틀즈였다. 그는 밥 딜런을 흉내내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또 하나의 밥 딜런이었다. 나훈아, 남진이 가요계를 주름잡고, ‘동백아가씨’가 히트하던 시절에 나타난 그의 모던 포크와 록은 한국문화사에 새로운 장을 열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이었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불행하단 말이냐? 유신체제 하에서 그의 히트 리스트는 모조리 금지곡으로 편입된다. 물 좀 주소! 그럼 유신체제에는 물이 없단 말이냐?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 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그는 결국 조국의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가 77년 그의 제2의 고향인 뉴욕으로 다시 이민갔을 때, 많은 사람이 그를 미국이라는 행복의 나라로 도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의 나라는 미국이라는 황야에 버려진 18세 소년의 조국의 따사로운 품에 대한 노스탈자였다. 그는 불교를 공부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한 무명(無名)·무실(無實)·무감(無感)은 18세 소년의 바람과 같은 청춘의 좌절감을 심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대수는 그냥 잊혀져버렸다. 아니 그냥 방기(放棄)된 것이다.

―그래 니 예술의 핵심이 뭐냐?

“사랑과 평화.”

―사랑이 뭐냐?

“구멍이야. 구멍만 행복하면 여자도 행복하고 남자도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져.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여자야.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남자야.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돼. 그래서 다 정신병에 걸리는 거야. 그런데 인류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정신병원은 없거든.”

―평화가 뭐냐?

“양보야. 손해볼 줄 아는 거지. 양보는 공부를 해야돼. 공부하면 공부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생겨. 이해가 생기면 양보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렇게 서로 죽이고 살 필요가 없잖아!”

한대수는 ‘노 릴리젼’(No Religion, 종교없는 세상)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르기 전에도 기도를 한다.

“어떠한 종교도 당신을 치료할 수 없네. 어떠한 사상도 시련도 당신을 해방시킬 수 없네. 그것은 고대의 여름. 산들바람을 찍은 사진이라네. 인생은 신기루(life’s a mirage). 맑스도 레닌도 당신에게 자유를 줄 수 없네. 어떤 증권도 채권도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그것은 처녀가 첫경험할 때 흘리는 눈물. 인생은 신기루라네.”

―모든 종교를 사랑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종교를 부정하라. 그 사이 어중간한 동네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You must love all religion or none at all. Anything in between is dangerous.) 이게 당신 말인데 참 대단한 명언이야. 그런데 넌 어느 쪽이냐?

“모든 종교를 사랑해야겠지.”

―그럼 난 모든 종교를 부정할께. 그게 예술과 철학의 차이일지도 몰라.

한대수는 한국현대음악사에서 음악에 철학·사상·이념을 부여한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기억될 것이다. 그 메시지의 흐름은 암울한 군사독재시대의 아침이슬과도 같은 김민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특정한 사회적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끊임없이 그의 삶의 고독과 좌절을 표현한 아름다운 시요 멜로디였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너무 영웅시하기 때문에 한국에다가는 설사를 싸지르곤 한다. 그러나 한대수는 한국에서 너무 평가해주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고독하고 청순한 생명력으로 남아있다. 난 한대수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지평 위에서 한국대중음악이 재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잊혀질 수 없는 한국의 근대사였다. 그는 영원히 다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거물이요 거장이요 거인이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다.

―야∼ 우리 단 둘이서 한번 공연을 해보자!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이렇게 우리의 취흥은 깊어만 갔다. 난 한대수를 사랑한다.

도올 김용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