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일기(4) – 첫주를 보내고..

여기와서 맞는 두번째 주의 월요일.

나를 이곳으로 불러준 IM(Information Management) General Manager(부장급) 아닐 파텔(Anil Patel)이 2주간의 관리자 Workshop을 마치고 돌아왔다. 반갑게 나를 맞으며 그동안 엄청나게 쌓인 이멜과 96건의 보이스 메세지가 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자랑인지 엄살인지 모를 푸념을 늘어 놓는다. 그의 자리에 앉아있다 옆의 탁자로 밀려난 나는 그가 누구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엿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동료들이 찾아와 Workshop은 좋았냐고 부러운 듯(내 생각에) 묻는데 ‘남들은 내가 2주간의 휴가를 다녀왔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변명처럼 대꾸한다. 여기서는 이 친구가 다녀온 Workshop이 임원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Director의 길을 약속 받은 것이다. 삼성에서 임원이 되면 22가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전 신문에서 기업마다 임원들 연봉차이가 최고 100배까지 난다고 조사된 걸 읽은 적이 있다. 언젠가 여기 한 친구가 현재의 CIO(Chief Information Officer)가 몇년 후 은퇴할 것이고 그때는 양손 가득히 돈가방을 들고 나갈 것이라고 몸짓까지 해가며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본사 임원도 꽤 대접을 받는 것 같다.

담배가 떨어져 식당 옆에 있는 담배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려는 순간 누가 등을 톡톡 치는게 아닌가. 돌아보니 여기 담배가 비싸니까 자기 것을 피우라며 입을 벌린 담배갑을 내민다. 여기 담배값은 엄청 비싸다. 4.5 파운드(1파운드가 1900원 남짓) 그러니까 대략 9천원 정도 한다. 담배를 권한 친구와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Senior Engineer(인도계 영국인)인 그는 내 타이틀을 보더니 ‘오 General Manager !’ 하며 나직히 탄성을 지른다. 내게는 직급이 높은 사람에 대한 가벼운 경의와 경멸이 섞인 것 처럼 들린다. 나는 지사의 직책은 별 것 아니라고 애써 답했다. 본사의 General Manager는 지사의 사장과 대우가 비슷하다고 들었다. 내 명함 뒤에는 부장/이사대우에 해당하는 General Manager란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 난 이게 싫어 이멜 뒤에는 항상 그냥 Manager라 쓴다. 지금 이사대우라 직원들은 이사라 부르지만 이것도 거북하다. 난 천성적으로 거품을 싫어한다. 거품이 낀 만큼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 토해낼 것이 있다는 걸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Group에서 상당한 파워를 갖게 될 아닐 파텔과 일하는 짬짬이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SAP도입 이후에 할 일이 별로 없게되는 나와 사쿠마상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곳에 부른 것이란다. 우리를 지사의 SAP Champion으로 키우려 하는 계획이다. 그를 만난지 7년째 되는데 그는 매우 정치적이어서 나나 다른 동료들하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자기 윗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말을 무척 아낀다. 어떨 땐 속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와 사쿠마상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대접할 때는 그냥 평범한 가정의 착실한 가장의 모습이 역역하다. 한편으론 나나 사쿠마에 대한 일종의 연민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에 진실이 담겨있는 것은 알 수가 있다. 거기에 자신의 다른 이해관계도 걸려있을지 모르지만… 영어가 많이 딸리는 사쿠마상은 여기와서 영어 개인교습도 받았다고 한다. (이걸 사쿠마상에게 확인해 보니 그는 겸연쩍은듯이 웃으며 내 머리를 톡 건드리며 부끄럽다고 했다.) 1대1 교습이라 돈도 적지않게 들어갈텐데 나도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한다. 본사 제너럴 매니저의 파워가 쎄긴 쎄다. 예산의 통제가 까다로운데 특히 지금은 반도체산업의 Downturn(경기침체) 기간이라 원가 절감한다며 법석을 떨었는데 이 사람들 돈 쓰는 걸 보니 여유가 있다. 물론 우리의 경우에도 지배구조의 상층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예산과 별 상관없이 돈을 쓰는 것 같지만… 전체예산은 본사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의 분배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물론 간단한 조회프로그램 만들어 화일 하나만 뒤져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다. 왜 그러냐구요 ? 피곤하니까 … ^^

한계는 있겠지만 이런 힘있는 친구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한 3~5년 정도 다니다 명퇴하고 장사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2~3년 더 늘릴 수도 있지 않을까 ? ^^ 누군가가 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글을 빌어 감사를 올린다.

요즘은 80년대 히트한 소설 ‘단(丹)’의 실제 인물인 봉우 권태훈 선생님(94년에 작고하심.)과 인연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분 생전의 일화가 담긴 책을 읽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휘날리는 백발의 그 분 모습 보면 뭔가 찌릿하게 전해 온다. 연정원이라는 생전해 계실 때 부터 운영하던 수련단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호흡 수련법을 카피해 놓고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16단계로 되어 있는데 1단계는 초보 입문단계로 호흡 보다는 20일간 매일 1시간 동안 정좌하며 일어나고 스러지는 생각을 관하는 것이다. 어제 처음 시도했는데 45분쯤 돼서 다리가 넘 아파 포기했다. 보다 깊은 단계에 가면 하루 아침저녁 2시간씩 총 4시간을 정좌하며 호흡 시간을 늘려가는데 한 호흡을 1분 정도로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이쯤되면 정신계의 초등학교 졸업수준이 된다 한다. 그러니 지금 나는 정신계의 유치원생이라 보면 딱 맞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구독하던 선사상이란 잡지에 이 분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었는데 한 호흡이 2분 정도로 늘어나면 격벽투시(벽을 뚫어 보는 능력)가 가능해 진다고 한다. 이런 道가 아닌 術法들을 부각시키다 보면 자칫 선생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가 있는데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세상을 알리는데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1시간 동안 버텨볼까 한다.
그럼 또…

2002년9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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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1월15일)는 사쿠마상과 함께 우리한테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먼저 우리를 여기에 불러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 아닐 파텔, 바쁜 가운데도 자신의 지식을 나눠주려 애 쓴 인도인 컨설턴트 아리야 그리고 잘 알고 지내는 친절한 다른 제너럴 매니저, 자마이카 흑인인 영국인 Howard Linton…

Crawley 인근의 Horsham에 타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내가 계산을 했다. 물론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쓸 수 있는 회사예산에서…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닐 파텔로부터 메일이 날아왔다.
어제 먹은 거 자기가 지불하겠다고 계산서 가지고 오란다.
나는 회사 비용으로 냈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내 주머니 사정이 염려가 됐던 모양이다.
전에도 이런 식의 배려를 여러번 해준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 딸아이들 학교보낼라고 했는데 잘 안돼서 하루 한시간씩 영어 가정교사를 불렀는데 그 비용의 반도 그 친구가 대줬다. (물론 자기 예산을 사용한 것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냉정하고 정치적인데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함을 지닌 친구다.

台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