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trapped in this life like an innocent lamb

버번街에 달은 뜨고

오늘 밤 버번街에 달은 뜨고
창백한 등불 아래 지나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네.
내게 다른 선택은 없어 오직 그 부름을 따를 뿐.
밝은 불빛, 사람 그리고 달 그리고 또 모든 것들.
매일 기도한다네 강해지기 위해서
내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 당신은 내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발자욱 소리도 들을 수 없어
버번街에 달은 떴는데…

여러 해 전에 난 지금의 내가 되었다네.
삶의 덫에 걸린 순진한 양처럼
지금 난 오직 한밤중에만 나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은 달빛 아래 걷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을 뿐
모자 챙 아래 숨겨진 야수의 눈.
죄인의 얼굴에 사제의 손을 가진 나.
오! 당신은 나의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발자욱 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버번街 위로 달이 떠 있네.

그녀는 매일 뉴올리안즈의 거리를 걷고 있네.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젊고 순진한 여자라네.
나는 그녀의 창 밖에 서서 많은 밤들을 보냈지.
창백한 달빛 속에 나의 본능과 싸우기 위해    
신에게 기도를 드릴 때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탄하며…
난 내가 파괴한 것과 내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한 것을 사랑해야만 하고
오! 당신은 나의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나의 발자욱 소리도 들을 수 없네.
버번街에 달은 떴는데…

“Moon Over Bourbon Street”

There’s a moon over Bourbon Street tonight
I see faces as they pass beneath the pale lamplight
I’ve no choice but to follow that call
The bright lights, the people, and the moon and all
I pray everyday to be strong
For I know what I do must be wrong
Oh you’ll never see my shade or hear the sound of my feet
While there’s a moon over Bourbon Street

It was many years ago that I became what I am
I was trapped in this life like an innocent lamb
Now I can only show my face at noon
And you’ll only see me walking by the light of the moon
The brim of my hat hides the eye of a beast
I’ve the face of a sinner but the hands of a priest
Oh you’ll never see my shade or hear the sound of my feet
While there’s a moon over Bourbon Street

She walks everyday through the streets of New Orleans
She’s innocent and young from a family of means
I have stood many times outside her window at night
To struggle with my instinct in the pale moon light
How could I be this way when I pray to God above
I must love what I destroy and destroy the thing I love
Oh you’ll never see my shade or hear the sound of my feet
While there’s a moon over Bourbon Street

슬픔의 공식(1)

딸래미 친구중 엄마랑 단 둘이서 오피스텔에 사는 아이가 있는데 아빠하고 엄마는 아이가 6살 때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가 요즘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월세도 못낼 지경이라 아이 한테 부산에 사는 아빠한테 가서 1-2년 만 살다 오라 했다고 한다. 엄마가 돈 벌어 다시 데리고 온다 하는데 … 아이는 아빠한테 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요즘 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이런 가운데 공식이 하나 떠오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흠.

신막 [愼幕]

신막은 나의 외할아버지다.
오늘 갑자기 생각나 검색을 해봤다.

이 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외할머니와 결혼하여 딸(어머니) 하나 낳고 집을 나가 모 대학 음악 교수와 재혼을 하여 자식을 두고 월북을 하였다는 것이 전부다.

외할머니와 우리 어미니, 두 모녀는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았다. 외할머니는 노년에 시동생집 (작은 외가)과 사위집(우리집)을 전전하다 돌아가셨다.  가끔 우리 집에 계실 때 못되게 굴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자신을 두고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정서적 불안정이 내 피속에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DNA만 유전 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가족의 내력도 유전될 수 있을 것이다.

대흠.

출처 다음백과사전

? 전남 목포~?
성악가.
1945년 전후로 대동아악단에서 성악가로 활약하면서 여러 연주회에 출연했고 지하 음악 써클 성연회(聖硏會)에 가담했다. 8•15해방 후 좌익음악운동단체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맹아〉(예술운동, 1945. 12)를 발표하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은 역사적 발전성을 가진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뿌리를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영향을 받은 성연회에 두었다. 1945년 10월 22일 전국음악가단체 대회를 소집하고 조선음악가협회 결성을 이끌었다. 그해 12월 13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재결성되자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5월 24일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자 선전국에서 활동했고, 1948년 4월 14일 박용구•이건우•안기영•박은용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10월 좌익 전향자 조직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2일 박은용과 함께 ‘민족정신 앙양 예술대회’에서 박영근과 북조선음악동맹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낭독했다. 그후 완전히 전향하여 1950년 6월 17일 대한교향악단 연주회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8년 생활 지침

새해 아침이라고 특별할 것도 없이 노트북 뚜껑을 열고 습관처럼 이메일을 뒤져 보았다.
새해 들어 처음 열어본 메일은 법정 스님으로 부터 온 메세지다.

올 한해 생활하는데 경구로 삼을까 한다.

대흠.










매일 출가(出家)하는 정신으로 2008년 새해를



(예병일의 경제노트, 2007.12.31)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가능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진다.

우리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저마다 자기의 일상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법정 잠언집)’ 중에서 (조화로운삶, 88p)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된다…”
홀로 정진하면서도, 법정 스님은 아침저녁 예불을 하루도 빼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쯤 예불을 쉰다고 무어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법정은예불을 하루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고, 그러면 삶 자체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감시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정 스님도 그럴진대, 일반인이야 더 말해야 무엇하겠습니까.

법정은 또 행복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언뜻보기에는 나누면 내 몫이 줄어들 것 같지만, 세상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풍요롭고 부자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경제노트 가족분들중에도 자신의 지혜와 지식, 정보를 따뜻한 마음으로 열심히 나누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서울서북부은평 독서모임의 이종현 명예회장님, 멀리 유럽에서 좋은 글을 계속 올려주시는 J&S
이밖에 수많은 가족분들이 경제노트의 다른 가족들을 위해 소중한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신 2007년 한 해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산사에서 홀로 지내는 스님이 타성과 나태,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떨쳐버리는출가의 정신으로 매일매일을 종교에 정진하고 있듯이, 세상에 있는 우리도 매일매일을 그런출가의 자세‘, ‘결단의 자세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스님이 매일 출가라는 큰 결심을 했던 때를 잊지 않으며 살아가듯, 우리도 내 인생의 목표를 정했던 때의 그 초심을, 그 마음가짐을 매일 유지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하며 그렇게 2008년 새해를 맞이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예병일 드림.

드디어 삼십여년 전의 고백을 할 곳을 찾았네요.


이름

台湖
등록일:2002/12/22

당시 중학교 이학년 이었을 겁니다. 서소문 TBC 방송국 앞, 길 건너편에서 서성대며 방송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죠. 지금도 제법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동양방송국 저녁 6시 ‘팝송다이알’이라는 프로가 끝나는 시간, 그러니까 7시 좀 넘어서죠… 매일 방송을 들으며 사모하던 그녀가 청바지 차림으로 방송국 건물 앞 계단을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차마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 멀리서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

편지 한통 썼다가 찢어버린 기억도 나는군요. 내가 봐도 어찌나 유치한지 차마 부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앓다가 그리고 잊혀졌다가 대학에 들어가서인가 명동 어디에서 스치듯 그녀를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더 흘러서 아주 오랜만에 TV에 나온 그녀는 어린 시절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하리 만큼 달라져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줌마가 되어버린 거죠. ^^

정말 반갑습니다. 양희은 누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

저도 이제 마흔넷인가,다섯인가(늘 헷깔려서…) 먹은 중년이 되었습니다. 흰머리는 늘어가고 머리숱도 자꾸 줄고 거울을 보면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사진을 보면 피할 수 없이 중년남자가 나오는군요. 처음에는 사진이 잘못 나왔겠거니 했는데 계속 그러니 더 이상 핑계를 댈 수가 없네요. 이제 그만 꿈 깨야겠죠.

여기는 영국 런던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롤리(Crawley)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본사에서 일 때문에 네달째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있었던 가족(처, 큰딸 장은빈,둘째 자빈 그리고 막내 현규)이 돌아가고 지금은 혼자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챙겨주기 힘들기도 하고 혼자있고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공항에 데려다 주고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썰렁함과 함께 금새 애들과 와이프가 그리워지네요.

이곳 직원들은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해서 들뜬 맘으로 다들 휴가를 떠났지만 저는 오늘도 회사에 나가 일(공부)를 했답니다. 달리 외로움을 달랠 방법이 없네요. 저도 다음 달엔 드디어 돌아갑니다. 그리운 고향, 내가 태어난 나라로…

제가 가지고 있는 희은누님의 노래는 아주 오래 전의 베스트 앨범하고 나뭇잎사이로(조동진님의 곡도 좋아했지만 누님의 곡은 편곡이 더 잘된 것 같아요) 하덕규의 ‘한계령’이 실린 음반, 그리고 작년에 산 ‘사랑 그 쓸쓸함에…'(맞나요?)가  담긴 그리고 사람좋게 생긴 이병우가 곡을 쓰고 참여한 CD앨범을 갖고 있습니다.

누님의 후반기 음악들은 뭐랄까… 누구나 세월과 함께 성숙해진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진부하단 생각이라…서늘한 깊이… 그리고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 … 영감과 같은 걸까요..(작년에 산 cd는 차에서 며칠을 계속 들었어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분히 다시 들어보고 느낌을 정리하면 표현이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좀 그렇군요.

홈페이지가 너무 훌륭합니다. 저도 작년에 개인 도메인 사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가 공개도 제대로 하지않고 폐쇄했죠.  욕심은 많은데 게으르니 스트레스를 받더라구요. 홈페이지 시작할 때 노래 참 좋네요. 돌아가면 당장 사 들어야 겠네요.

삼십년이 지나서 부치는 편지라 그동안 쌓은 내공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

바로 아래 딸이 어머니 모시고 누님의 공연에 다녀온 소감과 어머님의 감동을 올렸는데 노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좋은 노래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Crawley에서 台湖 드림.

양희은
2002/12/22
고마워요.  긴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누군가 위로가, 또는 벗이 필요할 때 노래는 등불이 되어줄 수 있죠. 파이가 아닌 등불! 나눠 주어도 줄어 들지 않는…. 큰 숙제예요.
김선애
2002/12/23
희은언니!  안녕하세요. 어제 친구로 부터 희은언니 홈페이지 소식을 들었어요. 학구열도 대단하시다고… 뭐든지 열심히 하시는 생활인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주들러 놀다 가겠
최수정
2002/12/23
너무,, 아름다운 팬 이시네요…  느티나무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台湖
2002/12/24
고맙습니다. 수정님 그리고 희은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