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막 [愼幕]

신막은 나의 외할아버지다.
오늘 갑자기 생각나 검색을 해봤다.

이 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외할머니와 결혼하여 딸(어머니) 하나 낳고 집을 나가 모 대학 음악 교수와 재혼을 하여 자식을 두고 월북을 하였다는 것이 전부다.

외할머니와 우리 어미니, 두 모녀는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았다. 외할머니는 노년에 시동생집 (작은 외가)과 사위집(우리집)을 전전하다 돌아가셨다.  가끔 우리 집에 계실 때 못되게 굴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자신을 두고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정서적 불안정이 내 피속에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DNA만 유전 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가족의 내력도 유전될 수 있을 것이다.

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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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목포~?
성악가.
1945년 전후로 대동아악단에서 성악가로 활약하면서 여러 연주회에 출연했고 지하 음악 써클 성연회(聖硏會)에 가담했다. 8•15해방 후 좌익음악운동단체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맹아〉(예술운동, 1945. 12)를 발표하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은 역사적 발전성을 가진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뿌리를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영향을 받은 성연회에 두었다. 1945년 10월 22일 전국음악가단체 대회를 소집하고 조선음악가협회 결성을 이끌었다. 그해 12월 13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재결성되자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5월 24일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자 선전국에서 활동했고, 1948년 4월 14일 박용구•이건우•안기영•박은용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10월 좌익 전향자 조직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2일 박은용과 함께 ‘민족정신 앙양 예술대회’에서 박영근과 북조선음악동맹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낭독했다. 그후 완전히 전향하여 1950년 6월 17일 대한교향악단 연주회에 출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