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원(圓)의 가르침

< 숭산 스님 >
선원-panna03

 

불교에서 원(圓)은 중요한 가르침의 도구다.

원을 신앙(원불교)의 상징으로 모시는 곳도 있다.

나도 때로 원을 사용해서 선 수행을 설명한다.

원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 180도 270도 360도를 돈다.

360도 지점은 처음의 0도와 똑같다.

먼저 0도에서 90도까지 지점은 집착과 생각의 영역이다.

생각은 욕심이고 모든 욕심은 고통을 부른다.

다시 말해

모양과 이름에 대한 집착의 영역(Small I)이다.

그러다 보니 분별심을 만든다.

옳고 그름

이것과 저것

아름다움과 추함

좋고 싫음

나의 것과 너의 것 등등 말이다.

이 몸은 탐 진 치 즉 욕심과 분노와 무지를 가지고 있다.

‘나’라는 이 몸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그리하여 0도에서 90도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고통 자체가 삶인 영역이다.

 

90도를 지나면 ‘나’라는 업의 영역(Karma I)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생각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나’라는 의식이다.

이해하는 것으로 ‘나’를 알고 싶은 상태이다.

각자는 각자의’나’를 만든다.

나는 교수야

나는 아버지야

나는 어머니야

나는 여자야

나는 한국인이야

0도에서 90도까지는 각각 모양과 이름에 대해 집착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르다.

90도를 지나도 생각에 집착한다.

모든 것이 같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당신은 0 이었다.

이제 당신은 하나이다.

언젠가 당신은 죽을 것이고 그때는 다시 0 이 된다.

그러므로 0 은 하나와 똑같고 하나는 0 과 똑같다.

원 위에는 모든 것이 같다.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이름과 모양은 공해서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이것 역시 지적인 생각이다.

 

180도의 영역은 생각이 전혀 없는 영역이다 (Nothing I )이다.

‘공’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나’가 완전히 사라지는 진정한 공의 영역이다.

모든 실체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색도 없고 공도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영역을 절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절대는 없다.

이 지점은 생각 이전의 지점이기 때문에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큰 실수이다.

당신이라면 이 영역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임제선사는

‘할’이라는 소리로 대신했고 덕산선사는 방망이로 내리쳤다.

이처럼 오직 행동만이 이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

말이나 단어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역에서는

산도 없고 강도 없고 신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오직 (“탕!”) 이 소리만 있을 뿐이다.

이 행위는 말이나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완벽한 공의 영역

즉 완벽한 ‘무자아’의 영역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180도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가 없는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또 그 경험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우주적 에너지를 갖게된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영역에 도달한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자유로운 ‘나’를 얻는 단계이다.

공간과 시간에 장애를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의 영역이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젼 만화를 참 좋아한다.

개 고양이 뱀 사자가 나와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고양이와 새가 서로 얘기도 한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손뼉을 친다.

만화에서는 어떤 행동도 가능하다.

이것은 만화에서뿐이 아니다.

(대흠: 전 아직은 선수행자가 아니고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로서 이 영역이 가장 마음에 와 닿네요.)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주적 에너지 혹은 어떤 특별한 힘과

강하게 연결되어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도가나 요가 수행자들 중에 많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에너지의 원리로 생각하면 된다.

만물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도사’, ‘초능력자’ 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지구는 양의 에너지를 대표하고 하늘은 음의 에너지를 대표한다.

일상의 도처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석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음극과 양극이 만나면 붙는다.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친다.

탁자 위에 자석들을 올려놓아 도넛 모양을 만들었다고 상상해보자 .

그중 한 개를 연필로 툭 치면

다시 자기들끼리 다른 극들을 찾아

똑같은 모양의 도넛 모양 배열을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는 우리 인간이

이 우주 에너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열심히 수행하면

완벽하게 공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우주적 에너지가 들어오게 된다.

절대 에너지를 얻는 것으로

에너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만약 우리 몸을 양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하면 대지와 몸은

서로 분리되므로 몸은 공중에 뜰 수 있다.

땅에 다시 내려오고 싶으면 음의 에너지를 만들면 된다.

어떤 도사들은

하늘을 떠다니거나 바위 덩어리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이 모두 ‘마음’을 사용하여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얻으면

자기 몸을 뱀으로 바꿀 수도 있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될 수도 있다.

또 물 위를 걸어다닐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그러나 선 수행은 이처럼 신비하거나

특별한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옛 선사들이

종종 초능력으로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깨닫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기는 한다.

미국 뉴욕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내 옆좌석 남자가

‘금연’ 표지를 보고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자 뒷좌석의 남자가 넌지시 한마디했다.

차 안에서는 금연입니다.

저기 금연 표지가 안 보입니까?

그러나 담배를 피워 문 남자는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담배 피우는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며 계속 피워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뒷좌석의 남자가 그의 빰을 갈겼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반격을 가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왜 때리는 거야

그러자 뒷좌석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때릴 자유가 있으니까요

180도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공함에 집착하게 된다.

270도의 영역에 멈추면 ‘자유’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음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지막 360도의 영역은 만물을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만물은 진리이다.

진리는 바로 이와 같다. 여여(如如, truth like-this)이다.

이 점은 0도의 위치와 같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출발 지점이 종착지가 된 것이다.

0도와 360도의 차이점은 0도는 집착하는 생각인 반면

360도는 집착하지 않는 생각 즉 무애(無碍) 것이다.

360도의 영역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가 된다.

나무를 볼 때 나무와 하나가 된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과

이 전 우주가 완벽히 하나가 된다.

이것을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른다.

한 순간에 무한의 시간이 있고 무한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에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이 있다.

이때 행하는 실천이 대보살행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생각에 집착하면서 차를 운전하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어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맑다.

운전할 때는 그냥 운전할 ‘뿐’이다.

진리도 이와 같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 불이 켜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본능적인 행동이란 욕심이나 집착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보살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삶이다.

0도는 ‘작은 나'(Small I )이다.

90도는 ‘업을 가진 나’ (Karma I )이다.

180도는 ‘나가 없는 나'(Nothing I )이다.

270도는 ‘자유로운 나'(Freedom I )이다.

360도는 ‘큰 나'(Big I )이다.

‘큰 나’ 란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단지 모든 중생을 구하고 돕고 싶을 뿐이다.

나와 너는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선 수행은 바로 이 360도에 도달하는 것이다.

360도에 도달하면 실제로 원도 사라진다.

원이란

단지 선을 가르치는 도구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를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실용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360도에서 우리 마음은 우주처럼 맑다.

거울처럼 맑다.

빨간 것이 오면 빨간 것을 비추고 하얀 것이 오면 하얀 것을 비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이 우리의 할 일인가.

나 또한 배가 고프다고 해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목이 마르다고 해야 하는가.

과연 그것이 진정한 대자대비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선과 명상 수행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깨달음

즉 실체와 실상만을 강조한다.

순간순간 진리의 올바른 실천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같이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는 게 돕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같이 갈증이 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선불교의 가르침도 그와 똑같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아 진리를 얻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순간순간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만물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360도에 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꽃은 붉고 벽은 하얗다.

나와 이 세계가 언제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된다.

큰 사랑과 큰 자비로 오로지 중생을 돕는 것.

 

[출처] 선원(禪圓) (숭산 행원 <선의 나침반>)작성자 정진연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