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가촌 명상문답 2007.09.22.
<문> 저는 깨달음, 일별(一瞥)이라는 단어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저는 깨닫지는 못 했어도 일별은 한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일별의 경험을 말하라고 하면 이렇다하게 사례를 들 수 없습니다.
일별이란 캄캄한 밤길을 번개 치는 순간 펀 듯 보듯 진리를 맛보는 것이라는데요.
샘께서는 일별의 경험을 어떻게 설명하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답> [일별이란 캄캄한 밤길을 번개 치는 순간 펀 듯 보듯 진리를 맛보는 것이라는데요.]그렇다.
그런데 그 표현은 비유다.
샘은 오쇼(라즈니쉬)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일별했다.
그 일별의 경험 중 하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련다.
주둥이가 좁은 유리병 안에 갇힌 큰 거위의 상황, 그것은 허구(虛構)라는 설득을 받는 순간 샘에게는 일별, 즉 순간 동안의 깨달음이 일어났다.
샘이 일별한 것은 봉황(자유)이다.
‘주둥이가 좁은 유리병 안에 갇힌 큰 거위의 상황.
그 운명적 질고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도 그 본질은 허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실은 자기의 내면을 투사하고 그것을 인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내면 구조가 다르면 현실감(투사)도 그만큼 다르게 마련이다.
봉황은 새 중의 새, 새의 황제(皇帝)가 아닌가?
새는 날개를 가졌기 때문에 ‘녹슨 철조망’ 그 오랜 국토 분단의 현실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새는 자유롭다.
그 자유로운 새 중에서도 가장 지존(至尊)한 새는 봉황이 아닌가?
그러나 거위는 날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짓궂은 개에게 쫓기기 일쑤인 신세다.
그러다가 안전한 병속으로 피해 들어갔고,
이젠 너무 비대해져서 병의 좁은 주둥이를 통해서는 고이 나올 수 없다.
모든 새는 봉황인 셈이었지만,
날개를 발달시키지 못하고 병속으로 은신하면서
거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샘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 오쇼가 툭 치면서 [새는 병 밖에 있다!]라고 귀띔하는 순간 샘은 봉황을 봤다.
즉 일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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