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삼십여년 전의 고백을 할 곳을 찾았네요.


이름

台湖
등록일:2002/12/22

당시 중학교 이학년 이었을 겁니다. 서소문 TBC 방송국 앞, 길 건너편에서 서성대며 방송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죠. 지금도 제법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동양방송국 저녁 6시 ‘팝송다이알’이라는 프로가 끝나는 시간, 그러니까 7시 좀 넘어서죠… 매일 방송을 들으며 사모하던 그녀가 청바지 차림으로 방송국 건물 앞 계단을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차마 앞에 나설 용기가 없어 멀리서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

편지 한통 썼다가 찢어버린 기억도 나는군요. 내가 봐도 어찌나 유치한지 차마 부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앓다가 그리고 잊혀졌다가 대학에 들어가서인가 명동 어디에서 스치듯 그녀를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더 흘러서 아주 오랜만에 TV에 나온 그녀는 어린 시절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하리 만큼 달라져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줌마가 되어버린 거죠. ^^

정말 반갑습니다. 양희은 누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

저도 이제 마흔넷인가,다섯인가(늘 헷깔려서…) 먹은 중년이 되었습니다. 흰머리는 늘어가고 머리숱도 자꾸 줄고 거울을 보면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사진을 보면 피할 수 없이 중년남자가 나오는군요. 처음에는 사진이 잘못 나왔겠거니 했는데 계속 그러니 더 이상 핑계를 댈 수가 없네요. 이제 그만 꿈 깨야겠죠.

여기는 영국 런던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롤리(Crawley)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본사에서 일 때문에 네달째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있었던 가족(처, 큰딸 장은빈,둘째 자빈 그리고 막내 현규)이 돌아가고 지금은 혼자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챙겨주기 힘들기도 하고 혼자있고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공항에 데려다 주고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썰렁함과 함께 금새 애들과 와이프가 그리워지네요.

이곳 직원들은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해서 들뜬 맘으로 다들 휴가를 떠났지만 저는 오늘도 회사에 나가 일(공부)를 했답니다. 달리 외로움을 달랠 방법이 없네요. 저도 다음 달엔 드디어 돌아갑니다. 그리운 고향, 내가 태어난 나라로…

제가 가지고 있는 희은누님의 노래는 아주 오래 전의 베스트 앨범하고 나뭇잎사이로(조동진님의 곡도 좋아했지만 누님의 곡은 편곡이 더 잘된 것 같아요) 하덕규의 ‘한계령’이 실린 음반, 그리고 작년에 산 ‘사랑 그 쓸쓸함에…'(맞나요?)가  담긴 그리고 사람좋게 생긴 이병우가 곡을 쓰고 참여한 CD앨범을 갖고 있습니다.

누님의 후반기 음악들은 뭐랄까… 누구나 세월과 함께 성숙해진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진부하단 생각이라…서늘한 깊이… 그리고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 … 영감과 같은 걸까요..(작년에 산 cd는 차에서 며칠을 계속 들었어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분히 다시 들어보고 느낌을 정리하면 표현이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좀 그렇군요.

홈페이지가 너무 훌륭합니다. 저도 작년에 개인 도메인 사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가 공개도 제대로 하지않고 폐쇄했죠.  욕심은 많은데 게으르니 스트레스를 받더라구요. 홈페이지 시작할 때 노래 참 좋네요. 돌아가면 당장 사 들어야 겠네요.

삼십년이 지나서 부치는 편지라 그동안 쌓은 내공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

바로 아래 딸이 어머니 모시고 누님의 공연에 다녀온 소감과 어머님의 감동을 올렸는데 노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좋은 노래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Crawley에서 台湖 드림.

양희은
2002/12/22
고마워요.  긴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누군가 위로가, 또는 벗이 필요할 때 노래는 등불이 되어줄 수 있죠. 파이가 아닌 등불! 나눠 주어도 줄어 들지 않는…. 큰 숙제예요.
김선애
2002/12/23
희은언니!  안녕하세요. 어제 친구로 부터 희은언니 홈페이지 소식을 들었어요. 학구열도 대단하시다고… 뭐든지 열심히 하시는 생활인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주들러 놀다 가겠
최수정
2002/12/23
너무,, 아름다운 팬 이시네요…  느티나무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
台湖
2002/12/24
고맙습니다. 수정님 그리고 희은누님 !

  3 comments for “드디어 삼십여년 전의 고백을 할 곳을 찾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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